공자, 계몽의 불빛

Voltaire

워싱턴 디시에 있는 미국 연방대법원 청사에 고대 중국의 철학자 공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진짜?” 하면서 못미더워할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르겠다. 미국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를 상징하는 건물에 공자라니! 공자와 민주주의의 연관성에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공자가 미국 민주주의와 뭔가 깊이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에는 어떤 당혹감마저 들지 모르겠다. 허나 의문이 든다면, 지금 바로 구글에서 ‘US supreme court confucius’로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확인 가능한 일이다. 거기서 당신은 건물 정면이 아니라서 종종 방문자가 지나쳐 버리기 쉽다는 설명과 함께 건물 동편 삼각형 벽면(pediment)에 공자가 인류사에 대표적인 입법자의 한 사람으로서 모세, 솔론과 같이 조각된 사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게 웬 일인가 싶겠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더 놀라운 사실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브 왕(Dave Wang) 박사에 의하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미국 100달러 지폐의 인물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가 발행하던 펜실바니아 가제트(Pennsylvania Gazette)에 칭송의 마음으로 공자의 도덕철학에 대한 에세이를 싣고 있다. 또 그는 기독교 전도로 유명한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에게 1747년에 쓴 편지에서, “공자는 나의 귀감이었다. 나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랐다”(Confucius was my example. I followed Confucius.)고 충격적인 고백을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카고대학 중국학 교수였던 크릴(H. G. Creel)에 따르면,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미국 민주주의의 이론가 토머스 제퍼슨도 공자와 중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보통교육의 실시에 대한 애착은 그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퍼슨이 1779년 버니지아주 하원에 보통교육과 관련된 법안을 제출했을 때, 그는 이미 당대 중국의 교육제도와 과거제도의 위대함과 우수성에 대한 학습을 끝마친 상태였다고 크릴은 확언한다. 문벌과 재산에 관계없이 국가가 전 국민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그 가운데 우수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해야만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제퍼슨의 철학 자체가 공자와 중국에 대한 학습으로부터 배양되었을 것임을 시사하는 코멘트와 함께.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프랭클린과 제퍼슨의 이러한 철학적 변화의 배경에 공자와 중국에 열광했던 프랑스 계몽주의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 계몽주의가 미국 독립운동과 건국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어느 정도 알려진 바이기는 하다. 그런데, 프랑스 계몽주의철학과 공자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관계도 프랑스 계몽주의철학자들이 공자와 당대 중국에 대해 동경하고 선망하는 관계였다고 한다면,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프랑스 계몽주의운동의 총아라 불리는 볼테르의 경우다. 그는 거의 2세기에 걸쳐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박해, 탄압, 전쟁으로 얼룩진 프랑스사회를 향해 종교적 관용과 공존을 역설한 철학자로서 유명하다. 그런데 황태연 교수에 따르면, 볼테르가 프랑스, 더 나아가 유럽을 종교적 독단이라는 잠에서 깨우는 데 이용한 불빛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서 초상화를 걸어놓고 경배할 정도의 공자와 중국의 제도였다. 그리하여 도덕문제에서는 “유럽인들은 중국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근래 한국에서도 상연된 바 있는 중국의 비극 <조씨고아>(The Orphan of Zhao)를 볼테르가 희곡 L’Orphelin de la Chine(The Orphan of China)로 번안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군주의 자의적 통치를 제한하고 정부를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게 해야 한다는 공자의 정치철학에도 찬사를 보내면서, “공자가 제시한 법을 따르는 시대”야말로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시대라고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근대정치경제학의 물꼬를 튼 중농주의학파의 창시자 프랑수아 케네도 이에 못지않다. 케네의 저술은 시장경제이론을 확립한 아담 스미스에게도 좌파경제학의 태두 마르크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월터 데이비스(Walter W. Davis)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케네의 모델이었다”. 케네는 원활한 시장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자유, 중상주의적 독점과 특권을 지속해온 정부의 불간섭, 가혹한 세금제도의 개혁 등의 발상을 모두 공자와 중국으로부터 배웠음을 그 자신의 마지막 저작에서 고백한다. 이리하여 그의 제자들이 그의 스승을 ‘유럽의 공자’(Confucius of Europe)로 불렀을 정도다.

이제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두 사람에게서 공자와 중국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지는 충분히 짐작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크릴 교수에 따르면, 그런 케네의 집에서 머물던 프랭클린은 그의 집에서 케네를 따르는 많은 파리의 인사들과 학문적 분위기가 충만한 교류를 할 수 있었고, 그런 볼테르가 저술한 논저들을 제퍼슨은 열심히 읽고 꼼꼼하게 주석까지 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어느 정도는 공자가 미국의 독립운동과 건국,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아니, 매우 중요했을지도 모를 관계였음을, 따라서 모두에 언급한 연방대법원 청사에 조각된 공자상은 그런 관계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면, 볼테르와 케네에게서 풍기던 공자에 대한 열광은 프랑스에서 이 두 그룹에게만, 그리고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경제학자 아돌프 라이히바인(Adolf Reichwein)에 따르면, 단적으로 서구의 계몽주의는 “공자의 중국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공자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수호성인”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식과도 같은 자유, 평등, 민주 등의 이념을 배양하기 시작한 계몽주의시대가 정녕 그런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그에 따른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이른바 역사적, 철학적 ‘상식’들에 대해 커다란 유보를 붙여놓고, 보다 더 완전한 역사상과 철학의 확립을 위해 다시 인류사에 대한 재탐색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우리는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새로운 지적 항해의 첫 보고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