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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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겐 갈 때마다 마치 고향에 돌아 온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타이완의 남동부에 위치한 타이둥현 청궁진台東縣成功鎮과 제주도 남부에 있는 서귀포시가 바로 그곳입니다. 인구 15,000명 정도의 작은 항구마을인 청궁진은 현재 일본에서 개봉중인 ‘타이완 만세’의 주된 촬영지로 약 100일간 머무른 곳이며, 서귀포시는 전작 영화 촬영으로 인연을 맺은 곳입니다.


저는 서른 넘어 영화계에 입문하여 주로 타이완을 무대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 편의 타이완영화를 보고 타이완을 찾았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된 할아버지가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건네 온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 분은 어렸을 때 자신을 귀여워해주신 일본인 선생님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53년이나 지난 1998년, 그렇게 일본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타이완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저는 일본과 타이완의 역사를 좀 더 알고 싶었고, 또한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저는 일본통치하에서 청소년시대를 보낸 타이완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생을 회고해보는 인터뷰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곳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그들의 삶을 찍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바로 청궁진으로 원주민족인 아미족과 17세기 이후 중국에서 이주해 온 한족계 사람들이 반반 정도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각각 다른 문화를 갖고 있지만, 그 차이를 받아들여 서로를 인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을이기에 우리들 촬영팀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고 신세를 졌는지 모릅니다.

또 다른 고향 서귀포는 2013년 ‘두 개의 조국, 하나의 사랑 – 이중섭의 아내’의 촬영으로 만나게 된 곳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국민적 화가 이중섭의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코 씨의 삶을 담았습니다. 그녀는 올 10월로 96세를 맞게 되시며, 현재 도쿄에 살고 계십니다.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한국으로 건너와 이중섭과 결혼했습니다.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 서귀포는 마사코씨가 가족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낸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우리들 촬영팀은 이 곳에서도 마을 주민들에게 환대를 받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과의 유대가 바로 청궁진과 서귀포를 ‘고향’으로 느끼게 해 준 것이지요.


스무 살이었던 대학 1학년 시절, 런던대학에 유학을 간 친구를 찾아 영국에 갔었습니다. 첫 해외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를 만나러 런던에서 서쪽 카디프로 갔습니다. 거기서 만난 영국인은 ‘아~ 일본, 모든 사람이 자전거를 타는 나라’하고 말했습니다. ‘그건 중국이라고요’하고 얘기해주고 싶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1990년이었지요. 일본은 버블이 붕괴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중국은 인민복에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연상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유럽의 서쪽 끝에 사는 영국인들에게는 극동의 일본이나 중국 모두 아시아의 어딘가에 있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 영국인과의 대화를 계기로 저는 자신을 ‘아시아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인’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 이전에 역시 저는 ‘일본인’입니다. 타이완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타이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일본어로 말씀하실 때마다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해 온 일, 하지 못했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만든 영화 ‘타이완 인생’이라는 작품을 상영한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되면 반드시 나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한반도도 타이완도 일본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 시대에 대한 평가가 전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라는.

타이완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기에 한반도애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타이완의 그 세대의 일본에 대한 생각은 애증이 섞인 복잡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은 여전히 타이완은 친일, 한국은 반일이라는 틀 속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민통치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서 말하자면, 타이완에도 한반도에도 일본인과 현지인들의 개인적인 교류가 있으며 우정, 남녀의 애정,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 등 다양한 인연이 생겨난 것도 사실입니다. 제게 말을 걸어 오신 타이완의 할아버지가 그랬고, 제 친구가 벌써 20년도 전에 한국을 여행했을 때, 서울의 한 공원에서 어떤 할머니가 말을 걸어 와 놀랐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는 오랜만에 일본인과 얘기를 나눠서 기쁘다면서 얼마간 그 공원에서 제 친구와 함께 지나간 날들을 추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반대로 일본인들의 횡포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타이완에서 만난 할머니는 동네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 경찰에 붙잡혔을 때, 경찰이 필요이상으로 심하게 그 사람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체험으로 각자가 일본이나 일본인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친일이나 ‘반일’과 같은 단어로 묶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대다수가 피카소나 모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틀림없이 그들의 작품 몇 개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머나 먼 유럽의 화가들을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이중섭을 포함한 이웃 나라 한국이나 중국, 타이완의 화가의 이름, 아니 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떠오르는 그림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아연실색할 일입니다. 일본의 화단자체가 메이지 이후, 유럽을 지향해 왔기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일본인들은 너무나도 이웃 나라를 모릅니다. 이것은 그림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마사코 씨의 영화를 찍기 전까지 제주도의 43사건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사코씨와 이중섭 화가는 1951년 한국전쟁의 포화를 피해 아들 둘을 데리고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을 왔습니다. 43사건이 시작된 지 3년, 제주도 사람들은 가족과 친척을 잃거나 자신들의 생명조차 위험한 때였지만, 한국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타이완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받았던 것 외에 또 한가지 근현대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국 모두 민주적 사회를 실현한 것이 80년대 후반이 되어서라는 것입니다. 1987년 타이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38년이나 이어졌던 계엄령이 드디어 해제되고 다음 해 88년에는 타이완인 최초의 총통 이등휘가 등장합니다. 한국은 서울올림픽, 즉 1988년 전까지는 군사정권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된 것은 1987년이었습니다. 두 이웃나라가 커다란 전기를 맞이했을 때 일본은 버블경기에 취해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타이완에 대해서도 한국에 대해서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두 개의 ‘고향’을 더 갖게 된 저는 더더욱 아시아인으로서의 자각이 커지고 있습니다. 문자로 남는 역사는 때때로 권력자나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이 됩니다. 그러나 시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온 시간, 인생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아시아인으로서, 같은 아시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 갈 것입니다..